[BASKETBALL]'상전벽해' 그 시절 NBA는 왜 인기가 없었을까

손대범 농구해설위원
2024-07-09


글_손대범 (KBSN 농구해설위원, 점프볼 편집인)


한 시즌의 대미를 장식하는 NBA 파이널.

파이널 대진은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필라델피아 세븐티 식서스와 LA 레이커스. ‘DR.J’ 줄리어스 어빙과 카림 압둘-자바 같은 ‘리빙 레전드’에, 떠오르는 신예 매직 존슨 등이 총출동!


만인의 기대가 집중된 파이널 1차전. 그런데 중계를 아무리 기다려도 TV에 나오지 않는다면? 유튜브는커녕 ‘모바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그 시절. NBA 파이널 첫 경기가 녹화 중계로 이뤄진다면?


오늘날 농구 인기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 그랬다. 매직 존슨이 스타로 발돋움한 1980년 NBA 파이널 시리즈는 대부분 녹화 중계로 이루어졌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레이커스의 홈구장 더 포럼(The Forum)의 평균 관중도 13,143명에 불과했다. 할리우드가 본거지이고 스타들이 포진한 팀치고는 굉장히 적은 인원이다. 더 놀라운 건 평균 13,143명의 관중만으로도 전체 3위였다는 것이다. 상대 팀 필라델피아의 홈 관중은 평균 12,168명이었고 리그 6위였다. (편집자주: 1980년 리그별 경기당 평균 관중수는 NFL 5만7천명 / MLB 2만1천명 / NHL 1만2천명 / NBA 1만명으로 NBA는 미국 4대 스포츠 중 '꼴찌'였다.)

 

숫자가 심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NBA가 인기 있는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NBA는 왜 인기가 없었나


야니스 아테토쿤보의 카드를 수집하던 친구가 있었다. 잘하긴 하는데, 아직 MVP는커녕 올-NBA 팀에도 오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친구의 믿음은 굳건했다. “언젠가는 크게 될 친구”라며 아직도 이름 읽기를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던 3년 차 선수의 카드를 귀하게 모셨다. 그리고 그 믿음이 통했다. 상이란 상은 독식하더니 기어이 밀워키 벅스를 우승으로 이끌고 MVP, 파이널 MVP까지 거머쥐었다. 당연히 카드의 가치도 올라갔다.


30년간 이런 선수들을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었다. 코비 브라이언트나 루카 돈치치는 어떤가. 처음에는 ‘그냥 한 장’ 신세였던 카드의 가치는 시시각각 변했고, 그들의 특별한 의미가 담긴 카드는 더욱 고귀한 존재가 됐다.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활약이 대단해지고 스토리가 탄탄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스토리를 전파하고 영향력을 선사하는 건 팬과 미디어의 역할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NBA는 가치가 없는 스포츠였고, 구성원인 선수는 팬들은 물론이고 미디어와 스폰서에게도 존중을 받지 못했다.


한 시즌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NBA 파이널이 녹화 중계되던 시절이다. 파이널이 녹화 중계였으나 플레이오프는 말할 것도 없다. 지역방송에서는 중계가 이뤄지긴 했지만, 인터넷과 같이 실시간으로 소식이 전달되는 시기가 아니었으니 전국적으로 몰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이클 조던이 데뷔하기 전, 23개 팀으로 구성됐던 NBA는 적자에 허덕였다. 덴버 너게츠와 유타 재즈 등 몇몇 구단은 합병을 논의하기도 했다. 저널리스트 데이브 할버스탐은 1981년에 적자를 낸 구단이 23팀 중 16팀이라고 전했다. 광고는커녕 관중 수입도 부족해 NBA가 배분하는 중계권 수입에 의존하는 팀들도 많았다. 인기가 없었으니까. 인기가 없으니 돈도 없고, 결국 몇몇 구단은 선수 등록 인원을 12명에서 10명으로 줄이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왜 인기가 없었을까.


팬들이 굳이 돈을 내고 시간을 들여 볼 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윌트 채임벌린, 빌 러셀, 오스카 로벌슨,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등.


팬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진 레전드들은 오늘날 각각을 상징하는 시그니쳐 플레이와 시그니쳐 기록들을 갖고 있으며, 젊은 선수들이 성과를 낼 때마다 X(트위터)와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에 소환되어 칭송을 받는다. 이때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같은 매거진들이 조명한 것은 맞지만, 타 종목에 비하면 영향력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미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인종차별은 ‘잘하는 흑인 선수’가 ‘스타’가 발돋움하는 시간을 지연시켰다. 1990년대 들어 마이클 조던이 대중의 우상이 되고, 그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모든 사람들이 입고 다니고 또 방에 포스터가 붙는 현상이 조명된 적이 있었다. 


그 시대의 젊은이들, 혹은 어린이들에게 ‘덕질’은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였지만, 흑인 사회학자들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보수적인 백인 중산층의 집의 가장이 자신의 자녀들이 흑인의 포스터를 붙이는 걸 허락하고, 같이 열광한다? 1970년대만 해도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종차별은 NBA뿐 아니라 사회의 중요한 이슈였다. 빌 러셀, 엘진 베일러 등 흑인 선수들은 백인 선수들과 같은 식당, 같은 호텔을 사용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이러한 분리 정책에 반기를 들어 보이콧을 선언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차별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그 시기 선수들은 지금과 같은 존중을 받지 못했다. 선수 협회 회장이 된 오스카 로벌슨을 비롯해 많은 레전드들은 프로선수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다.


젊은 선수들이 선배들을 보면 여전히 기립박수를 보내고 고마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배들의 투쟁이 없었으면 그들도 백만장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니까.


상황이 이러니 백인 구단주들이 흑인 선수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마케팅 차원에서 뭔가를 만들거나 도울 리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대다수가 백인 소비자들인 농구 팬들이 흑인들이 갑부가 되는 것을 환영했을 가능성도 적다. 참고로 NBA에 흑인 구단주가 등장한 건 NBA 출범 50년이 훌쩍 지난 2004년이었다. 샬럿 밥캐츠(현 샬럿 호네츠) 구단주 로버트 존슨이 그 주인공이었다.


제도적인 문제도 있다


스포츠 카드나 피규어, 저지 등 컬렉션의 가장 큰 매력은 희소성과 스토리에 있다.


첫 소속팀, 기록적인 경기나 대회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NBA는 오늘날 KBL처럼 오랫동안 ‘폐쇄성’을 고수해온 리그였다.


자유계약선수(Free Agent)인데 ‘자유’가 없었다. 즉, A선수를 영입한 구단은 원소속 구단에 보상을 해야 했다. 선수, 지명권, 현금 등이 그 보상의 내용이었고, 당시 총재였던 래리 오브라이언의 승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성립이 됐다.


1974년, LA 레이커스는 FA 선수였던 카지 러셀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러셀에 대한 보상으로 1976년 1라운드 지명권을 러셀의 이전 소속팀이던 골든스테이트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골든스테이트가 그 지명권으로 선발한 선수가 바로 로버트 패리시였고, 그는 훗날 보스턴 셀틱스에서 래리 버드, 케빈 맥헤일 등과 ‘빅3’가 되어 활약했다. 지명권이 돌고 돌아 레이커스의 최고 라이벌이었던 셀틱스의 전력 강화에 힘이 된 셈이다.



1976년에는 뉴올리언스 재즈(현 유타 재즈)가 게일 구드리치를 LA 레이커스로부터 영입했다. 185cm의 백인 가드 구드리치는 평균 20득점을 올릴 수 있는 선수였다. 게다가 로스엔젤레스에서는 높은 인기를 자랑하던 선수였기에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재즈는 구드리치를 영입하면서 레이커스에 지명권을 3개(1977, 1978, 1979)나 넘겨줬다. 레이커스는 그 지명권으로 1979년에 매직 존슨을 지명했다.


이처럼 FA가 이동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옮기지 못하니 보는 재미도 덜할 수밖에 없었다. 구단이 트레이드하거나, 선수 영입을 위해 출혈을 감수하지 않는 이상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구조였다.


드래프트도 마찬가지로 1순위 지명권은 최하위 2팀의 동전 던지기로 결정됐다. 많이 지는 것이 답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쟁도 뻔해지고 흥미도 떨어졌다. 오늘날처럼 ‘추첨’을 통해 이뤄지면 이변이 나올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는데, 하킴 올라주원이 지명된 1984년까지만 해도 많이 지면 장땡이었다.



이러면 스토리가 만들어질 수가 없다. 결국 선수협회는 단체 행동에 나섰다. 올스타 휴식기 때 총재를 불러내 담판을 지은 것이다.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말이다. 이들은 보이콧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막 NBA가 인기를 끌던 시점이었기에 NBA 사무국도 더 일을 키우기를 꺼려 했다. 결국 1988년을 기점으로 보상 제도가 완화되었다.


그 첫 수혜자가 바로 1988년 탐 채임버스로, 시애틀 슈퍼소닉스에서 피닉스 선즈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오픈된 건 아니었고, 7년 이상 베테랑이거나, 데뷔 후 계약을 2번 체결한 선수만 해당이 됐다. 지금의 WKBL과 비슷한 형식이다.)


그렇다면 구단이 보상 제도를 유지하고, 폐지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들 걱정한 것은 역시 빅마켓 집중 현상이었다. 선수들이 뉴욕, 시카고, LA 같은 곳에만 갈까 걱정한 것이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만약 ‘패배에 지친’ 제리 웨스트가 승리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이적했다면? 그래서 빌 러셀-존 하블리첵-제리 웨스트-샘 존스 라인업이 꾸려졌다면? 아마 보스턴의 트로피는 더 늘어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84년 2월, NBA 총재로 부임한 데이비드 스턴은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했다. 샐러리캡 시스템을 정교화하고, 이적 제도를 손보면서 유연하게 대처한 것이다. 이러한 이적의 재미 역시 큰 스토리가 되는 법. 그 스토리를 담은 다양한 굿즈 역시 팬들에게는 ‘필수 소장’ 대상이 되면서 더 재미를 더하게 됐다.



마케팅의 필수 조건 : 이미지


그런데 그 스토리가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하나를 더 보완해야 했다.


주인공이 될 선수들의 이미지였다. 팬들이 호감을 가져야 기록이든, 플레이든 의미가 생기는 것인데 스폰서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NBA 선수들의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다.


한 스포츠 저널리스트는 “NBA 선수들은 금목걸이에 마약을 하고, 불성실한 키 큰 흑인의 이미지였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1980년대까지 NBA 선수들의 이미지가 굉장히 안 좋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폭력’이었다. 경기 중 시비가 잦았다. 그러다 급기야는 1977년 12월 9일에는 커밋 워싱턴(당시 LA 레이커스)이 루디 탐자노비치(당시 휴스턴 로케츠)에게 주먹을 휘둘러 탐자노비치를 시즌아웃으로 몰고 갔다. 탐자노비치는 코뼈와 광대뼈가 골절되었고, 워싱턴은 징계로 60일간 경기를 뛰지 못했다. 그 당시 기준으로는 NBA 역사상 가장 긴 징계였다. 문제는 싸움에 그치지 않았다. ‘흑인이 백인에게 펀치를 날리는 장면’은 수십만 명이 보는 주요 TV 프로그램에 반복해서 재생됐고, 주요 매체들이 일제히 다루었다.


▲ 카림 압둘-자바의 개명 이전 본명: '루 알신더'


사람 좋아 보이는 카림 압둘-자바도 밀워키 벅스 센터 켄트 벤슨에게 팔꿈치로 얻어맞자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지금은 완전히 금지됐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NBA도 야구처럼 벤치 클리어링이 있었다. 오늘날 NBA는 싸움이 일어날 경우, 벤치에 있는 선수들이 코트에 한 걸음이라도 나오면 무조건 징계가 내려진다. 그러나 이때는 그런 규칙이 없었기에 서로 다툼이 많았다.


이처럼 ‘주먹질’이 자주 일어나니 방송사도 생중계를 더 꺼렸다. 싸움, 그 자체가 방송사고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분위기가 과열되는 플레이오프는 더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NBA 중역이었던 릭 웰츠는 「ESPN」과의 인터뷰에서 “스폰서들을 만나면 늘 우리에게 시큰둥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스턴 총재는 이런 싸움의 원인이 거친 몸싸움에 있다고 봤다. 실제로 심판이 안 보이는 곳에서 팔꿈치를 휘두르고, 밀고 당기는 일이 잦았다. 이런 것들이 쌓이다 보니 결국 사소한 신경전에도 폭발했다는 것이다.



결국 NBA는 삼심제, 즉 심판을 2명에서 3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마련했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예산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심판이 3명이 되어도 ‘배드보이’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처럼 밀고 때리던 팀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NBA는 플레이그런트 파울 도입을 비롯해 경기를 더 안전하고 매너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문제는 싸움만이 아니었다. 코카인을 비롯한 마약도 NBA의 철퇴 대상이었다.


1980년 「워싱턴 타임스」는 NBA 전체 선수 중 75%가 코카인을 경험했고, 상당수가 흡연자라고 보도했다. AP도 같은 맥락의 보도를 했는데, 몇몇 선수는 경기 전날까지도 파티에 참석해 밤새워 놀다가 훈련에 지각하는 일도 있었다.


시카고 불스와 마이클 조던의 일대기를 담은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신인’ 조던의 소속팀 불스 선배들이 호텔방에 모여 도박을 하고, 여성들을 불러 음주와 약을 하는 등 문란했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스턴 총재가 취임한 이후에도 마약 문제가 근절되지 않았다. 1986년에는 특급 신인 렌 바이어스가 지명되고 바로 다음 날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크리스 워시번, 로이 타플리, 윌리엄 베드포드 등 같은 해에 지명된 선수들도 약물 때문에 퇴출되거나 징계를 받았다.


스턴 총재는 선수들의 마약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처음 자발적으로 신고한 선수에게는 회복의 기회를 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은 퇴출 절차를 밟았다. 아예 코트에 발도 못 내딛게 만든 것이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농구 잘하는 선수’를 ‘롤 모델’로 만드는 것이었다. 건강해지기 위해 우유를 마시고, 학교 수업에 빠지지 말고 독서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메신저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 1991-92 어퍼덱 바스켓볼에 등장했던 마이클 조던의 <STAY IN SCHOOL>캠페인 카드

때마침 등장한 마이클 조던은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팬들이 동경하고, 꿈꿀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마케팅을 통해 이미지를 팔았다. 때마침 NBC와 중계권 계약을 체결해 전국적인 노출을 늘렸고, 케이블 TV를 통해 ‘당시 기준’ 신세대들이 좋아하는 힙합 음악과 농구를 결합한 컨텐츠를 제작해 유통했다. NBA 농구를 엔터테인먼트로 확산시킨 것이다. 


재정이 확보되자 구단들도 관중몰이를 위해 애를 썼다. LA 레이커스는 때마침 제리 버스가 구단주가 된 이래 할리우드라는 매력적인 백그라운드를 십분 활용했다. 티켓 가격을 의도적으로 높여 1층은 셀러브리티들을 위한 공간으로 포장했다. ‘레이커 걸스’라는 공연팀을 꾸려 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수 폴라 압둘이 ‘레이커 걸스’를 통해 배출된 대표적인 인물이고, WWE에서 활동했던 카멜라(본명 리아 밴 데일)도 20대 초반에 레이커 걸로 활동했다. 그런가 하면 필라델피아 세븐티 식서스는 초대 가수를 초청해 관중들의 흥을 돋웠다. 경기의 가치를 그렇게 높여간 것이다.



농구의 가치를 높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농구와 농구선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NBA 선수들은 선택지가 많았다.


우선 라이벌 리그 ABA(American Basketball Association)가 있었다. 1967년 출범해 1976년에 NBA에 합병된 이 리그는 유망한 스타들을 두고 NBA와 영입 경쟁을 펼쳤다. 때때로 NBA에 지명되고도 계약을 거부하고 ABA로 가는 선수들도 있었다. 또 이를 무기 삼아 연봉을 높이고자 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ABA는 흥행 경쟁도 펼쳤는데 3점슛, 슬램덩크 컨테스트, 초대 공연 등 각종 기발한 아이디어를 먼저 도입한 곳이 바로 ABA였다. ABA는 심지어 하프 타임에 서커스 공연까지 시도했다.


길거리 농구 무대도 있었다. 뉴욕 러커 파크로 대표되는 길거리 농구는 사실 큰 돈이 되는 무대는 아니었다. 그런데 러커 파크에는 때때로 NBA 선수들조차도 1대1로 이기지 못할 강적들이 많았다. 


1960~1970년대 뉴욕 할렘가를 휩쓴 조 해먼드는 별명이 ‘파괴자(The Destroyer)’였다. 그는 윌트 채임벌린, 줄리어스 어빙 등 전설들조차 인정했던 실력자였다. 채임벌린은 레이커스 구단에 해먼드를 스카우트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해먼드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굳이 NBA에 가지 않아도 돈을 많이 번다는 이유다. 그의 주수입원은 다름 아닌 마약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NBA의 제안을 거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약 사범으로 체포되어 11년형을 선고받았다. 


‘GOAT’ 얼 매니걸트는 카림 압둘-자바가 자신이 대적했던 상대 중 최고라고 꼽았던 길거리 농구의 대스타다. 신장이 180cm 정도 밖에 안 됐는데 볼 핸들링 기술과 스피드를 앞세워 선수들을 골탕 먹이곤 했다. 그러나 그 역시 헤로인 중독으로 인해 프로선수가 되진 못했다.


이처럼 선수들의 선택지가 많다 보니 NBA가 지금과 같은 ‘인생 역전’의 무대가 되진 못했다. 동경할 이유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ABA와 NBA가 합병하고, 리그 규모가 커지면서 선수들의 연봉도 자연스럽게 치솟게 됐다. 또 스포츠 스타가 사회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파악한 기업들이 후원 계약을 체결하며 선수들의 가치를 더 높여주었다. 에이전트 산업이 발전하면서 그 값어치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 1979년 NBA 선수 최초로 연봉 100만달러를 받았던 모제스 말론


덕분에 NBA 선수가 되어 계약을 맺으면 평생 만져보지 못할 거액을 벌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100만 달러라는 돈은 지금도 어마어마한 액수다. 아마도 1990년대에는 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따라서 선수들은 NBA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매일 새벽부터 땀을 흘리며 실력을 연마했고, 자연스럽게 품질도 향상됐다.


아무나 못 들어오는 무대. 고교-대학 최고 실력자들이라 해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무대. 1990년대 NBA는 이러한 이미지를 굳히는데 성공했고, 오늘날에는 ‘미국’이 아닌 ‘세계’로 범위를 확대해 ‘지구에서 농구를 가장 잘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리그로 발돋움했다.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다


1990년대 NBA는 디지털로 변화하는 환경에 굉장히 빠르게 적응하고, 또 젊은 층을 겨냥해 빠르게 적용하며 스포츠 마케팅의 선두주자로 거듭났다. 홈페이지, 저작권 관리, 미디어 응대, 사진 및 영상 컨텐츠, 그리고 이를 활용한 굿즈 등 모든 면에서 교재의 사례로 남을 정도였다. 보수적이었던 유럽 리그 단체들이 보고 배워갔을 정도다.


경기도 많이 달라졌다. 사실 채임벌린, 오스카 로벌슨, 줄리어스 어빙, 래리 버드 등 이름만 들으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전설들이지만, 아마도 그 시절 풀 경기를 틀어주면 1쿼터부터 4쿼터까지 다 지켜볼 팬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한창 공부할 때 지인들이 구해준 옛날 경기 영상을 기쁜 마음으로 열어보았다가 ‘지루하다’라고 느꼈던 적이 있다.



경기 자체가 굉장히 낯설었기 때문이다.


24초가 없던 시절부터 시작해 경기 템포가 느렸던 시절, 무척이나 거칠었던 시절, 플레이가 단순했던 시절, 3점슛 없이 밋밋하게 2점 싸움만 이어졌던 시절, 수비에 치중했던 시절 등이 있었다. NBA가 이런 요소들을 뜯어고친 이유는 젊은 팬들이 더 관심을 갖고, 중계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NBA와 ‘농구’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왔다.


이처럼 NBA가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건 정책과 규칙에 변화를 주어 시스템을 만든 데이비드 스턴 집행부의 역량이 컸고, 그 시스템 속에서 빛난 슈퍼스타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시도를 세계에 알린 ‘중계’도 빼놓을 수 없다.


중계권 계약은 NBA에 계속해서 거액을 안겨주었고, 이는 NBA의 든든한 밑천이 되었다. 2025년이 되면 NBA는 새로운 중계사와 손을 잡는다. 2002년 「ABC」와 6년 24억 달러 계약으로 맺은 인연은 2008년 74억 달러(8년), 2016년 260억 달러(9년) 계약으로 연장됐다. 2016년의 경우, 우리 돈으로 하면 35조 짜리 계약을 체결한 것인데, 덕분에 2018년에 NBA는 최초로 전 구단의 가치가 10억 달러를 돌파하는 경사도 맞았다. 아마도 새로운 계약은 앞선 260억 달러 계약을 상회하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NBA가 마이너한 해외 스포츠일 뿐이지만, 미국에서는 NFL 다음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스포츠로 자리 잡은 덕분이다.



이러한 성과는 NBA가 또 다른 모험과 도전을 하는 밑천이 될 것이고, 선수들 역시나 ‘부자’를 넘어 어지간한 대기업 이상의 존재감을 보이게 될 것이다.


언젠가 NBA 한 구단의 소셜미디어 팀이 한국농구연맹(KBL)이나 어지간한 국내 프로스포츠 단체보다도 인원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이들은 계속해서 다각도에서 선수들의 스토리와 표정, 플레이, 패션 등을 잡아내기 위해 움직일 것이며, 그동안 쌓인 수많은 기록과 명장면들을 활용해 새로운 컨텐츠를 만들어낼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사볼 가치가 있는’, ‘모을만한 가치가 있는’ 리그를 만들기 위한 그 노력이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을 연출할지 기대된다.


글_손대범 (KBSN 농구해설위원, 점프볼 편집인)